메뉴 건너뛰기

원불교 교리

본문시작

원불교 교리

개교의 동기 -전산 김주원 법사님의 법문 -

관리자 2009.07.31 09:00 조회 수 : 2500

고해의 생령을 낙원세계로 - 개교의 동기Ⅰ

김 주 원

1. 개벽된 인간

선후천이 교역되는 개벽 시대를 맞이하여 참으로 광대하고 즐겁고 밝은 RM 시대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 시대에 맞는 사람의 도리를 깨우치는 새 주세불의 교법이 필요하고 그 교법으로 거듭난 개벽된 인간이 필요하다.

대종사께서는 새 세상 새 천지를 조판하는 개벽성자로서 일원의 종지를 중심한 삼학 팔조와 사은 사요의 광대하고 원만한 교법을 내셨거니와 그 교법으로써 가르치고자 하는 2대 핵심을 개교의 동기에서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 정신 세력을 확장하여 광대 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리라 하셨다.

그러므로 이제 인류는 진리적 종교의 신앙으로 인생의 뿌리를 찾고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 결심을 거두어서 개벽된 정신을 함양하여 새 시대의 도운을 마음껏 활용하는 새 사람이 되어야 되겠다. 그렇다면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이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가.

2. 신앙과 훈련

신앙이란 보통 불완전한 인간이 절대의 위대한 힘을 믿고 받들며 의지하여 그 힘의 보호와 가호를 받고자 하는 종교적 행위이며 훈련이란 나 자신 속에 내재되어 있는 무한한 진리성을 계발하여 인간의 능력을 키워서 절대의 자리에 이르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을 의미한다고 보겠다. 지금까지의 종교 형태는 대체로 신앙을 중심하면 훈련이 약하고 훈련을 강조하면 신앙이 약하여 두가지중 어느 일방이 더욱 중시되어지는 경향이었다.

대종사께서는 일원의 진리를 밝히시면서 일원은 우주 만유의 본원이요 제불 세정의 심인이요 일체 중생의 본성이라 하여 절대한 진리의 위력이 밖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안에만 내재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나와 더불어 우주 만물 전체가 다 한 가지 진리의 체성임을 밝히셨다.

때문에 자력만 강조하는 것도 진리의 반쪽이며 강조하는것도 진리의 반쪽이며 타력만 강조하는 것도 진리의 반쪽일 수 밖에 없다. 현실로 볼 때 아무리 좋은 음식을 똑같이 주어도 소화를 잘 시키는 사람은 몸이 건강할 것이요 소화를 잘 시킬 힘이 없는 사람은 건강을 잃게 되는 것도 같으며, 또 아무리 소화를 잘 시킨다 해도 영양가가 충분한 음식을 고루 주면 건강할 것이요 영양도 없는 음식을 주게 되면 건강을 잃게 되는 이치와 같다.

이처럼 우리 인생의 있어 자력과 타력은 아울러 같이 소중하며 그 무엇 하나가 약해도 인생의 행복을 보장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신앙과 훈련은 그 무엇 하나도 없어서는 안될 상호 바탕되고 근원되는 것으로 두가지가 병진될 때 혜복을 고루 갖춘 복된 삶이 될 것이다.

3. 진리적 종교의 신앙

신앙과 훈련이 수레의 두 바퀴처럼 서로 없어서는 안될 것으로 병진해야 한다고 할 때 신앙은 어떠한 신앙이라야 할 것인가. 종래의 다양한 종교 신앙 형태가 있지만 대종사께서는 진리적 종교의 신앙을 천명하신다. 진리란 우리 삶의 본질이요 근원이요 이법이기 때문에 신앙 또는 거기에 맞는 신앙을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종사께서는 성리품에 종교라 이름하여 싱리를 밝힌 바가 없으면 사도라고 단언하신다. 성리에 바탕한 종교 즉 일원의 진리에 근원한 종교가 곧 진리적 종교다. 말은 다르고 설명은 달라도 뜻은 하나로 통해야 하는 것이다.

일원의 진리에 근원한 종교는 어떠한 신앙 형태를 가질 것인가. 첫째는 우주 만유 전체를 진리의 한 덩치로 알아 모두를 신앙의 대상삼는 것이다. 알고 보면 진리란 따로이 있는 것이 아니며 성자들이 만든 것도 아니다. 인생과 우주의 실상을 여실히 나타낸 것일 따름이다. 그런데 혹자는 진리를 찾으면서 현실을 떠나 먼 이상의 세계에서 추구하려 하는 오류를 범한다. 대종사는 우주 만유의 본원인 일원의 진리를 말하여 우주 만유 전체가 그대로 진리의 한 이치요 한 기운이요 한 체성임을 가르치신다. 때문에 그러한 진리를 믿는다 함은 전체가 곧 법신불임을 진리적으로 믿는 것이다. 어느 곳에서나 무엇을 대하나 우리는 진리를 여읠 수 없으며 신앙의 대상을 여읠 수 없는 것이다.

둘째는 전체가 진리의 한 몸임과 동시에 하나 하나가 모두 나에게 조복을 줄 권능이 있는 대상으로 믿는 것이다. 동포에게 당한 죄복도 부처님께 빌고 부모님께 당한 죄복도 부처님께 비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죄복을 주는 당처 당처에 직접 죄복을 비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에 부함되고 사실다운 신앙이라고 깨우쳐 주신다. 우리는 흔히 현실은 불완전하고 불합리한 것으로 그 이면에 내재된 이상적인 완전자를 숭배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면에 내재된 완전한 진리성이 결국은 현실의 다양한 모습으로 나에게 관계됨을 알아야 하며 현실 하나 하나의 모습이 진리의 완전한 모습임을 느껴야 할 것이다.

셋째는 그러한 현실적 진리 하나 하나가 나에게 죄복으로 관계될 때 그것의 결정은 밖의 타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몸과 마음을 사용하는 바에 따라 지극히 공정하게 응하여줄 따름이라는 것을 알아 매사에 불공의 생활을 놓지 않는 것이 참된 진리적 신앙이다. 그러므로 몰아 말하자면 모두가 부처님이니 어느 때 어느곳에서나 늘 부처님을 대하는 엄숙한 마음과 경건한 태도로 그일 그일에 불공을 잘하는 것이 곧 진리적 종교의 신앙이라 할 수 있겠다.

4. 사실적 도덕의 훈련

모두를 부처님으로 모시고 그일 그일에 불공을 잘하여 무한한 진리의 위력을 얻고자 할 때에 불공을 잘 할 수 있는 각자의 마음 작용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보통 우리 인간은 마음 먹은 바와 행하는 바가 일치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좋은 일을 하려 해도 욕심이 동하거나, 습관이 안되거나 나태하거나 방심하거나 하여 실천하지 못할 때가 많다. 또 해서는 좋지 않은 결과가 올 줄 알면서도 스스로 자제하지 못하고 욕심이나 습관에 끌려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므로 불공이 좋은 줄을 알면서도 결국 불공이 제대로 못되어 스스로 고통과 빈곤과 어려움을 자초하는 경우가 그 얼마나 많은가. 그러기 때문에 대종사께서는 다시 훈련을 강조해 주신 것이다.

우리 마음은 본래 원만한 진리성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각자의 단련 여하에 따라서 얼마든지 훌륭한 인격을 이루어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심신을 훈련해 감에 있어서도 진리에 부합되는 방법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사실적 도덕이다. 사실적 도덕이란 진리를 생활에 맞게 활용하도록 해주신 법으로 볼 수 있는데 단적으로 말하면 불공법으로 볼 수도 있다. 그일 그일에 불공하여 무궁한 복락을 얻고자 할 때 그 마땅한 방법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전 인류가 이 길대로만 하면 한략없는 복락을 누릴 수 있도록 내주신 것이 사실적 도덕이요, 이 도덕으로 우리 심신을 단련하자는 것이 사실적 도덕의 훈련이다. 그러면 어떻게 훈련해야 사실적 도덕을 쉽게 체질화 시킬 수 있을 때 단련하는 상시 훈련법과 일 있을 때 단련하는 상시 훈련법과 일 없을 때 단련하는 정기 훈련법으로 제시하시고 이의 구체적인 실천 방법까지 가르쳐 주고 계신다. 도덕 수련이라 하여 사농공상의 인간의 의무와 도리를 저버리고 부모 처자도 버리고 생활을 떠나 수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 속에서, 사농공상의 직업으로 인간의 의무와 도리를 다하는 그 가운데 우리 인격을 훈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 속에서, 사농공상의 직업으로 인간의 의무와 도리를 다하는 그 가운데 우리 인격을 훈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종사님의 훈련법은 이사병행(공부와 사업을 아우르는)의 훈련법이요 영육쌍전의 훈련법이다. 자칫 이러한 대의를 놓치고 과거와 같이 수도 일방의 수련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대종사님의 가르치신 본의가 아니요 새 시대의 새 인간을 태어나게 하는 개벽시대의 수련법이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새 시대의 신앙 새 시대의 훈련법으로 무궁한 진리의 위력과 체성을 다 발현시켜 한량없는 정신의 힘으로 풍부한 물질을 능히 노예삼아 활용하는 개벽된 인간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5. 광대 무량한 낙원

그와 같이 될 때 이미 그 사람은 광대 무량한 낙원에 있게 된다. 안으로 걸림없는 자유자재의 심락을 누릴 것이요, 밖으로 조금도 군색함이 없는 넉넉한 육신의 낙을 누리게 될 것이다. 또한 그러한 사람이 있는 가정, 사회, 국가, 세계도 자연히 그 기운이 미쳐 도덕적으로 향상되고 물질적으로 균등한 문명세계가 열리게 될 것이니 이것이 대종사 염원하시는 내외 문명이 겸전한 대낙원이다. 원불교 교도는 다같이 이 낙원에 살기를 염원하고 정진해 가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