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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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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교리

삼 학

관리자 2009.07.31 09:00 조회 수 : 2476

삼 학

김 주 원

1. 삼학이란

삼학은 법신불일원상을 수행의 표준으로하여 우리의 마음을 닦아서 법신불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알고 기르고 사용하게 하는 마음공부의 방법으로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의 세가지 공부길을 말한다.

대종사께서는 일체중생의 본성이 곧 진리와 더불어 둘이 아님을 일어주시고 성품의 내역을 공(空)원(圓)정(定)으로 밝히신 바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래 성품을 회복하기로 하면 이 세가지 방면의 공부가 필요한 것인바, 수양은 공을 단련하는 길이요, 연구는 원을, 취사는 정을 단련하는 공부로 성불을 목적하는 수도인은 이 세 공부길을 놓고 다시 다른 공부가 없다 하겠다.

또한 모든 학술을 공부하여도 그 쓰임에는 간단이 있으나 마음공부만은 일분 일각도 쉬임없이 활용된다 하셨으니 삼학의 공부야말로 전 인류가 원만한 인격을 이루고 행복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될 필요불가결의 공부라 아니할 수 없다.

대종사께서는 이 공부법을 모르는 사람도 부지중 일을 당하면 삼학을 들이대게 되지만 단련이 없기 때문에 바르게 그 힘을 활용하기가 어려우나 공부인들은 일의 유무를 막론하고 늘 삼학을 공부로 지속하기 때문에 그 힘이 쌓여서 결국에는 모든 것을 임의자재할 만한 큰 실력을 얻게 된다 하겼다. 우리는 삼학의 공부가 우리 인생에 어떠한 필요가 있는가 깊이 깨쳐서 쉬임없는 삼학 공부에 정진해야될 줄 믿는다.

2. 정신 수양

사람의 정신은 원래에 두렷하고 고요하여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곳인데 사욕의 마군을 따라서 어둡고 흐려지고 탁해져서 죄업을 장만하는 근본이 되기 때문에 그 마음을 닦아서 두렷하고 고요한 정신을 양성하자는 것이다. 일이 없을 때에는 염불 좌선 심고기도주송 등으로 마음에 일체 잡념을 잠재우고 일심을 기르며 일이 있을 때에는 그일 그일에 마음을 멈추어 부동심을 기르고 동시에 정신을 집중하고 전일시키고 통일시키고 통일시켜서 일심의 힘을 기르는 공부인바 오래 오래 계속하면 영단이 커나고 부동의 힘을 얻으며 청정심이 되어서 천만 순역경계에 자주의 힘을 얻고 생사의 업해(業浿)를 뛰어 넘으며 자성의 공명이 발해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근본적 힘을 얻게 된다 하셨다. 그러므로 대종사께서 인생의 목적은 수양에 있다 하셨듯이 수양이야말로 인생에 있어 해야 될 가장 크고 근본적이고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수양이 없는 인생은 메마른 사막을 가는 것 같고 기름없는 기계와 같아서 각박하고 삭막하고 고통스럽기가 비할 데 없고 수양하는 인생은 샘물이 솟고 숲이 우거진 길을 가는 것 같고 윤활유를 듬뿍 친 기계와 같아서 그 마음의 여유있고 넉넉하고 시원하고 헌거로움을 무엇에 비할 것인가. 세상에 아무리 좋은 보배도 이 수양의 힘만큼 좋은 것이 없을 것이니 우리는 천번 만번 억만번 무량번 멈추고 가라앉히고 맑히는 가운데 대수양력을 얻도록 서원하고 정진해야할 것이다.

3. 사리연구

일과 이치간에 연마하고 궁구해서 알자는 것인데 일에는 시비이해를 분석하고 이치는 대소유무를 깨치자는 것이다. 과거에는 진리를 깨치기로만 위주하여 일체 분별을 놓는 것으로만 공부를 삼았으나 대종사께서는 분별없는 자리와 분별있는 자리를 같이 알아서 원만한 대도를 성취하도록 법을 내주셨다. 때문에 일이 없을 때에는 경전 강연 회화 의두 성리 정기일기 등 여러 가지 과목을 정하여 지혜를 밝히도록 하셨고 일을 당해서는 미리 연마하고 그일 그일에 알음알이를 구하는 공부로 큰 지각을 얻도록 해 주셨다. 천하에 아무리 좋은 이치가 있다 하여도 그것을 깨쳐서 활동하지 못하면 그 가치를 발휘하지 못할 것이니 비유하여 말하자면 여기에 아주 좋고 편리한 기계가 있다하여도 그 기계의 원리를 알아 활용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는 것과 같다 하겠다. 하물며 이 천지에는 이치가 정연하고 사람의 행할 바 인도가 또한 삼연한 것이니 그 이치를 모르고 인도의 행할 바 바른 길을 알지 못한다면 행하는 일마다 죄업이요, 고통을 장만하는 자료가 되어 영원한 세상에 빠져나올 수 없는 대함정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과 이치간에 천번 만번 억만번 무량번 묻고 배우며 연마하고 깨쳐서 대반야지를 얻고 대지각력을 얻어서 천만 사리에 걸림없는 힘으로 영생의 앞길을 밝히는데 노력해야 하겠다.

4. 작업취사

몸과 마음을 작용할 때에 옳은 것은 취하여 실행하고 그른 것은 버려 행하지 말자는 공부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다 낙은 좋아하고 고는 싫어하지만 낙을 받는 사람은 적고 고를 받는 사람이 많은 것은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대종사께서는 사람 사람이 다 몰라서 죄를 짓거나 알고도 실행력이 없어서 죄를 짓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일러 주셨다. 때문에 이 취사공부는 삼학의 결과임과 동시에 죄복 고락간에 당하는 모든 일의 원인이 결국 이 취사의 잘잘못에 기인함을 알 때 우리는 이 공부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상시일기 주의 조행 등의 공부로 안으로 계율을 지키고 밖으로 정의를 실현하는데 정성으로 노력해야 될 것인바 대종사께서도 이 취사 공부의 어려움을 생각하시어 우리 공부인으로 하여금 죽기로써 이 공부를 하도록 강조해주셨다. 아무리 작은 일이지마는 선은 실행하기가 어렵고 악은 범하기 쉬운 것이 우리 일상의 생활 습관임을 생각 할 때 대저 죽기로써 하는 혈성의 노력이 아니면 어떻게 범부의 습성을 불보살의 습관으로 기질변화 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나에서 열 백 천 만 무량에 이르기까지 참고 끊으며 실행하는 대적공이 아니면 능히 큰 실행력을 얻기가 어려울 것이다. 아무리 적은 선이라도 힘써 실행하고 아무리 적은 선이라도 힘써 실행하고 아무리 적은 악이라도 힘써 끊어서 대적공이 쌓이면 드디어 법강항마의 힘을 얻게 되고 대중도행 대자비행의 큰 덕화를 나투어 삼계의 대권을 행사하는 불보살의 큰 능력을 얻게 될 것이다.

5. 삼학의 병진

이상의 세가지 공부는 서로 각기 다른 공부가 아니라 마음의 원래를 회복하는 한 공부길로 수양을 잘 하면 연구 취사가 잘 되고, 연구를 잘하면 수양 취사가 잘되며, 취사를 잘하면 수양 연구가 잘되어 서로 그 힘을 어울리는 것이며 또 수양을 잘하려면 연구 취사가 합력되어야 하고 연구를 잘하려면 수양 취사가 합력되어야 하며 취사를 잘하려면 수양 연구가 합력되어야 하므로, 그 어느 하나가 빠져도 원만한 힘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종사께서도 쇠스랑의 세발ㅇ에 비유하셨으니 우리는 이 삼학을 공부할 때에 그 무엇 하나를 가장 중요시하거나 그 무엇 하나만을 독특하게 선호하여 편수하거나 하지 말고 삼학을 원만하게 병진하는 것이 대종사의 가르쳐주신 본의요 진리에 부합되는 길이며 대도 수행의 가장 바르고 빠른 길이 되는 줄을 알아서 삼학을 원만히 병진하는데 큰 표준을 두고 늘 돌아보며 결함됨이 없도록 조절해 나가야 하겠다.

6. 삼학과 훈련

대도수행의 원만한 수행법으로 삼학을 밝혀주시고 일상의 생활에 이 삼학을 결함없이 밟아가도록 제정해주신 법이 정기와 상시의 훈련법이다. 정기는 수양 연구를 주체삼아 저축삼대력을 길러서 동시 공부를 준비하고 상시는 작업취사를 주체삼아 활동삼대력을 길러서 정시 공부의 자료를 준비하여 동정간 끊임없이 삼학으로 수련토록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원불교 교도는 다른 데에서 성불의 길을 찾지 말고 이 정기와 상시의 훈련법이 바로 천여래 만보살을 배출하고자하는 대염원으로 내주신 간이하고 명확한 대도 수련의 길임을 자각해서 이 공부법으로 여래의 불지에 이르도록 대적공해 나가야 하겠다.

7. 결 어

이상으로 삼학에 대해서 개괄하였다. 삼학은 결국 우리의 자성을 깨쳐서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그 힘을 기르며 일용행사에 그렇게 나투어서 자타간 한량없는 복혜의 문로를 열자는 것이니 수행문의 강령인 무시선 무처선이 곧 삼학병진의 결론이 되겠다. 과거에 많은 성자가 수행길을 밝혔으나 대종사의 삼학공부처럼 원만하고 간이하고 분명해서 모든 공부를 총섭하는 공부는 일찍이 찾기 어려울 듯하다. 우리는 대도수행의 바른 길을 알고 또 지도해줄 스승을 만났으니 힘써 정진하여 다같이 대불과를 얻으시기를 염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