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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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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교리

일원상(一圓相)의 진리

관리자 2009.07.31 09:00 조회 수 : 2436

1. 일원상(一圓相)의 진리(眞理)
김주원
대산 종사님 법문에 「우리 회상은 여래를 표준한 회상이다」는 말씀이 있다. 왜 여래를 표준했다고 하셨을까 처음에는 자신 공부와는 너무 먼 말씀으로 생각되었으나 뒤에 생각해 보니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준으로 밝혀 주신 저 일원상 자리가 바로 여래 자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났다. 때문에 우리 교단은 법 높으신 스승님들만 여래를 표준하여 생활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도 어른도 남자도 여자도 오래 되신 분도 이제 갓 들어온 신입 교도님도 누구나 여래를 표준하고 살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공부의 단계를 일러주신 법위등급의 마지막에 대각여래위로서 공부의 최구경을 삼아 주신 듯 하다. 아마 종래에 다른 성자들께서 이처럼 진리 자리를 그대로 상징하여 드러내서 직접 그 진리를 신앙케 하고 직접 그 진리를 수행케 해주신 예가 거의 없지 않나 생각되며 우리 전 교도는 대종사님께 큰 은혜를 느껴야 할 것이다. 또한, 그 진리도 심오한 그 자리는 가히 말이나 형상이나 동작으로 나투어 보일 수 없는 자리지마는 어리석은 중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자비 방편으로, 형상으로 나투어 주시고 다시 글로써 진리의 윤곽이나마 더우잡도록 안내를 해주시어 깨치지 못한 제자들로 하여금 방황하지 않고 쉽게 대도에 들 수 있도록 해주셨으니 참으로 그 은혜 한량없다. 우리 모두는 일원상 장을 통하여 신앙과 수행의 핵심인 진리에 대하여 터득하는 바가 있어야 되겠다.
가. 일원은 우주 만유의 본원이며 제불 제성의 심인이며 일체 중생의 본성이며
일원이라는 호칭은 대종사님께서 이름할 수 없는 그 진리를 강연히 이름하여 주신 진리의 명칭이라, 하나(一)는 진리의 체가 본래 둘 아님을 나타내신 듯하고, 원(圓)은 둘 아닌 그 진리가 또한 차별이 분명하여 일체 모든 것이 구족한 진리의 용을 나타내신 듯 하다. 그러므로 어찌보면 일원 두자에 진리의 전체 내용을 축약하여 우리의 공부길을 인도해 주시지 않았나 생각된다.
진리의 내용 중 이 부분은 그 진리와 우리의 관계를 밝혀 신앙 수행을 연결해 주신 대목이 아닌가 한다. 즉 우주 안의 모든 것은 다 그 진리에 바탕하여 생성 변화하고 있고, 모든 부처님과 성자들의 깨치신 자리도 다 같은 그 진리 자리이며 모든 중생들의 마음의 본래 또한 그 진리 자리와 조금치도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은 진리의 절대적 위력을 대상하여 신앙 즉 불공 생활을 하고 모든 성자를 표준하여 내 마음을 닦아 나가는 수행을 하도록 하신 이유가 바로 이러한 진리에 연유해 있음을 알려주신 듯 하다.
나. 대소 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며 생멸 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며 선악 업보가 끊어진 자리며 언어 명상이 돈공한 자리로서
본원이 되고 심인이 되고 본성이 되는 그 진리는 어떠한 것인가 하는 점을 세가지 방향으로 설명하시는 중 첫째인 진리의 빈자리를 표현해 주신 대목인가 한다. 본원이 되고 심인이 되고 본성이 되는 그 자리를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가 텅 비었다는 것이다. 대종사께서는 성리품에 이 자리를 무무역무무(無無亦無無)없고 또한 없고 없다 하여 비었다는 것마저도 텅 비어버린 절대의 공자리로 가르쳐 주신다. 보통 우리가 현실에 살고 있는 분별지로 볼 때에는 이 천지는 대소 유무의 이치로 운행됨이 분명하고 우주 만유는 생멸 거래의 변화를 벗어날 수 없으며 우리의 생활에는 선악의 행동과 그에 따른 결과가 분명하며 우리의 마음에는 또한 분별이 역력하여 터럭 끝 하나도 서로 명상을 달리하여 구별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타난 세계로 볼 때 부정할 수 없는 이러한 사실이 그러한 모든 것의 본원이 되고 본성이 되는 근본 자리에서 볼 때에는 본체다 현상이다 있다 없다 하는 것도 본래에는 없고, 무엇이 있어졌다 없어졌다 하고 왔다 갔다 하는데에 따라 변화되어지는 바도 없으며, 착하다 악하다 하는 것과 그에 따른 죄다 복이다 하는 것도 없고, 우리의 모든 생각마저도 다 쉬어버린 절대의 공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내 마음과 모든 것의 참다운 본 바탕이다. 이러한 본 바탕을 알게 되면 현실의 모든 것이 참이 아님을 알게 되어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나 이 바탕을 알지 못하면 결국 거짓을 참으로 그림자를 실체로 알아 평생을 어리석음에 끌려 그릇 살다가 또한 영생의 앞길을 그르치게 될 것이다.
금강경에 「무릇 상 있는 바가 다 허망한 것이니 모든 상이 참다운 실상이 아님을 알면 바로 여래를 본 것이다」는 법문도 바로 이러한 진리를 설파하신 듯 하며 우리는 이 법문을 인연해서 본래 있지 아니한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나투는데 노력해야 될 것이다.
다. 공적 영지의 광명을 따라 대소 유무에 분별이 나타나서 선악 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며 언어 명상이 완연하여 시방 삼계가 장중에 한 구슬 같이 드러나고
일체가 다 비어서 그 무엇이라 결정할 수 없는 그것이 그대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신묘 불가사의한 광명이 있어서, 그 밝음을 따라 본체와 현상과 있고 없음의 분별이 나타나고, 그에 따라 일체 차별이 나타나서 선악의 짓는 바에 따라 죄복의 보응이 호리도 틀림없이 있게 되며, 일체 만물은 그 어느 것 하나 같은 것이 없이 언어와 명상을 달리 하여 천백억 화신의 무량한 차별 세계가 전개되어지는 것이 바로 진리의 두 번째 내용임을 밝혀 주신 것이다. 진리의 밝음은 빈 가운데 나타나므로 그 무엇하나도 가리거나 걸림이 없이 지극히 밝은 것이라고 정산 종사께서는 일러 주셨다. 이러한 신묘한 밝음이 있어서 이 우주는 호리도 착오가 없이 운행이 되고 이 밝음을 체받은 성자들께서는 우주의 진리와 인생의 대의를 통달하여 만중생을 제도하는 법을 짜주신다. 이러한 진리의 광명은 삼세를 일관하고 시방을 통철해 있으므로 진리의 밝음을 피해 숨을 곳이 어디이며 속일 곳이 어디일 것인가. 또한 그 밝음은 본래 우리의 마음이니 우리도 수도하여 가린 것만 걷어버리면 창천에 태양이 솟듯이 지혜광명이 발현되어 진리를 오득하고 만 중생을 건지는 대각 성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라. 진공 묘유의 조화는 우주 만유를 통하여 무시 광겁에 은현 자재하는 것이 곧 일원상의 진리니라
없는 가운데 묘하게 있어지는 진리의 조화는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통해서 비롯이 없는 과거로부터 마침이 없는 미래에 이르기까지 무량한 세월에 혹 나타나기도 하고 혹 숨기도 하여 무한히 순환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일원상으로 나타내 보이신 진리의 성격임을 가르쳐 주셨다. 천지를 움직이는 주인공을 찾아 보면 찾을 수 없으나 우주는 성주괴공으로 춘하추동으로 쉬임없이 돌고 돌아 만물을 생성 변화시킨다. 나무를 쪼개어 보아도 아름다운 색이나 풍성한 과일이 없건 마는 때가 되면 형형 색색의 기묘한 색이 나타나고 갖가지 맛의 진기한 과일들이 열린다. 나타났던 색과 열매도 영구 불변하게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그 명색을 감춘다. 이 모든 것이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요 아무렇게나 질서없이 되어지는 것도 아니요 무위자연한 가운데 조금치도 차서에 어그러지지 아니하고 역력하게 이루어진다. 이것이 대진리의 조화이다.
이처럼 근본을 찾아보면 그 형상이나 명색이나 한 생각의 분별마저도 찾을 수 없는 그것이, 없는 그 가운데 신령스런 광명이 있어 일체차별이 터럭 끝만치도 틀리지 아니하게 나타나고, 영원히 돌고 도는 그 힘은 만유를 있게 없게 없게 있게 하는 무궁한 변화를 나투게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주의 실상이요 우리 각자의 모습이다. 이러한 진리는 알고 모름을 떠나 이미 그러한 것이다. 다만 성자들께서 그러한 진리를 먼저 깨치시어 우리를 진실의 세계로 인도하실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원상의 진리를 대하면서, 과연 나는 나라는 것에 대해서, 또 우리가 늘 몸담고 의지하며 그 힘으로 살아가는 이 우주에 대해서, 또 늘 서로 만나 희비애락의 감정 속에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이웃들에 대해서 얼마나 참모습을 알고 있으며 인생의 진실에 접근하고 있는가, 고요히 돌아볼 일이다. 그리하여 종래에 가졌던 어리석음의 눈을 씻고 다시 밝은 진리의 눈을 얻어서 옳고 그름과 허위와 진실과 이롭고 해로움을 참답게 알 수 있는 사람이 되고 거짓에 붙잡혀 울고 웃는 모든 이들을 바르게 인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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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원

대산 종사님 법문에 「우리 회상은 여래를 표준한 회상이다」는 말씀이 있다. 왜 여래를 표준했다고 하셨을까 처음에는 자신 공부와는 너무 먼 말씀으로 생각되었으나 뒤에 생각해 보니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준으로 밝혀 주신 저 일원상 자리가 바로 여래 자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났다. 때문에 우리 교단은 법 높으신 스승님들만 여래를 표준하여 생활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도 어른도 남자도 여자도 오래 되신 분도 이제 갓 들어온 신입 교도님도 누구나 여래를 표준하고 살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공부의 단계를 일러주신 법위등급의 마지막에 대각여래위로서 공부의 최구경을 삼아 주신 듯 하다. 아마 종래에 다른 성자들께서 이처럼 진리 자리를 그대로 상징하여 드러내서 직접 그 진리를 신앙케 하고 직접 그 진리를 수행케 해주신 예가 거의 없지 않나 생각되며 우리 전 교도는 대종사님께 큰 은혜를 느껴야 할 것이다. 또한, 그 진리도 심오한 그 자리는 가히 말이나 형상이나 동작으로 나투어 보일 수 없는 자리지마는 어리석은 중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자비 방편으로, 형상으로 나투어 주시고 다시 글로써 진리의 윤곽이나마 더우잡도록 안내를 해주시어 깨치지 못한 제자들로 하여금 방황하지 않고 쉽게 대도에 들 수 있도록 해주셨으니 참으로 그 은혜 한량없다. 우리 모두는 일원상 장을 통하여 신앙과 수행의 핵심인 진리에 대하여 터득하는 바가 있어야 되겠다.

가. 일원은 우주 만유의 본원이며 제불 제성의 심인이며 일체 중생의 본성이며

일원이라는 호칭은 대종사님께서 이름할 수 없는 그 진리를 강연히 이름하여 주신 진리의 명칭이라, 하나(一)는 진리의 체가 본래 둘 아님을 나타내신 듯하고, 원(圓)은 둘 아닌 그 진리가 또한 차별이 분명하여 일체 모든 것이 구족한 진리의 용을 나타내신 듯 하다. 그러므로 어찌보면 일원 두자에 진리의 전체 내용을 축약하여 우리의 공부길을 인도해 주시지 않았나 생각된다.

진리의 내용 중 이 부분은 그 진리와 우리의 관계를 밝혀 신앙 수행을 연결해 주신 대목이 아닌가 한다. 즉 우주 안의 모든 것은 다 그 진리에 바탕하여 생성 변화하고 있고, 모든 부처님과 성자들의 깨치신 자리도 다 같은 그 진리 자리이며 모든 중생들의 마음의 본래 또한 그 진리 자리와 조금치도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은 진리의 절대적 위력을 대상하여 신앙 즉 불공 생활을 하고 모든 성자를 표준하여 내 마음을 닦아 나가는 수행을 하도록 하신 이유가 바로 이러한 진리에 연유해 있음을 알려주신 듯 하다.

나. 대소 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며 생멸 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며 선악 업보가 끊어진 자리며 언어 명상이 돈공한 자리로서

본원이 되고 심인이 되고 본성이 되는 그 진리는 어떠한 것인가 하는 점을 세가지 방향으로 설명하시는 중 첫째인 진리의 빈자리를 표현해 주신 대목인가 한다. 본원이 되고 심인이 되고 본성이 되는 그 자리를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가 텅 비었다는 것이다. 대종사께서는 성리품에 이 자리를 무무역무무(無無亦無無)없고 또한 없고 없다 하여 비었다는 것마저도 텅 비어버린 절대의 공자리로 가르쳐 주신다. 보통 우리가 현실에 살고 있는 분별지로 볼 때에는 이 천지는 대소 유무의 이치로 운행됨이 분명하고 우주 만유는 생멸 거래의 변화를 벗어날 수 없으며 우리의 생활에는 선악의 행동과 그에 따른 결과가 분명하며 우리의 마음에는 또한 분별이 역력하여 터럭 끝 하나도 서로 명상을 달리하여 구별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타난 세계로 볼 때 부정할 수 없는 이러한 사실이 그러한 모든 것의 본원이 되고 본성이 되는 근본 자리에서 볼 때에는 본체다 현상이다 있다 없다 하는 것도 본래에는 없고, 무엇이 있어졌다 없어졌다 하고 왔다 갔다 하는데에 따라 변화되어지는 바도 없으며, 착하다 악하다 하는 것과 그에 따른 죄다 복이다 하는 것도 없고, 우리의 모든 생각마저도 다 쉬어버린 절대의 공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내 마음과 모든 것의 참다운 본 바탕이다. 이러한 본 바탕을 알게 되면 현실의 모든 것이 참이 아님을 알게 되어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나 이 바탕을 알지 못하면 결국 거짓을 참으로 그림자를 실체로 알아 평생을 어리석음에 끌려 그릇 살다가 또한 영생의 앞길을 그르치게 될 것이다.

금강경에 「무릇 상 있는 바가 다 허망한 것이니 모든 상이 참다운 실상이 아님을 알면 바로 여래를 본 것이다」는 법문도 바로 이러한 진리를 설파하신 듯 하며 우리는 이 법문을 인연해서 본래 있지 아니한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나투는데 노력해야 될 것이다.

다. 공적 영지의 광명을 따라 대소 유무에 분별이 나타나서 선악 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며 언어 명상이 완연하여 시방 삼계가 장중에 한 구슬 같이 드러나고

일체가 다 비어서 그 무엇이라 결정할 수 없는 그것이 그대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신묘 불가사의한 광명이 있어서, 그 밝음을 따라 본체와 현상과 있고 없음의 분별이 나타나고, 그에 따라 일체 차별이 나타나서 선악의 짓는 바에 따라 죄복의 보응이 호리도 틀림없이 있게 되며, 일체 만물은 그 어느 것 하나 같은 것이 없이 언어와 명상을 달리 하여 천백억 화신의 무량한 차별 세계가 전개되어지는 것이 바로 진리의 두 번째 내용임을 밝혀 주신 것이다. 진리의 밝음은 빈 가운데 나타나므로 그 무엇하나도 가리거나 걸림이 없이 지극히 밝은 것이라고 정산 종사께서는 일러 주셨다. 이러한 신묘한 밝음이 있어서 이 우주는 호리도 착오가 없이 운행이 되고 이 밝음을 체받은 성자들께서는 우주의 진리와 인생의 대의를 통달하여 만중생을 제도하는 법을 짜주신다. 이러한 진리의 광명은 삼세를 일관하고 시방을 통철해 있으므로 진리의 밝음을 피해 숨을 곳이 어디이며 속일 곳이 어디일 것인가. 또한 그 밝음은 본래 우리의 마음이니 우리도 수도하여 가린 것만 걷어버리면 창천에 태양이 솟듯이 지혜광명이 발현되어 진리를 오득하고 만 중생을 건지는 대각 성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라. 진공 묘유의 조화는 우주 만유를 통하여 무시 광겁에 은현 자재하는 것이 곧 일원상의 진리니라

없는 가운데 묘하게 있어지는 진리의 조화는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통해서 비롯이 없는 과거로부터 마침이 없는 미래에 이르기까지 무량한 세월에 혹 나타나기도 하고 혹 숨기도 하여 무한히 순환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일원상으로 나타내 보이신 진리의 성격임을 가르쳐 주셨다. 천지를 움직이는 주인공을 찾아 보면 찾을 수 없으나 우주는 성주괴공으로 춘하추동으로 쉬임없이 돌고 돌아 만물을 생성 변화시킨다. 나무를 쪼개어 보아도 아름다운 색이나 풍성한 과일이 없건 마는 때가 되면 형형 색색의 기묘한 색이 나타나고 갖가지 맛의 진기한 과일들이 열린다. 나타났던 색과 열매도 영구 불변하게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그 명색을 감춘다. 이 모든 것이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요 아무렇게나 질서없이 되어지는 것도 아니요 무위자연한 가운데 조금치도 차서에 어그러지지 아니하고 역력하게 이루어진다. 이것이 대진리의 조화이다.

이처럼 근본을 찾아보면 그 형상이나 명색이나 한 생각의 분별마저도 찾을 수 없는 그것이, 없는 그 가운데 신령스런 광명이 있어 일체차별이 터럭 끝만치도 틀리지 아니하게 나타나고, 영원히 돌고 도는 그 힘은 만유를 있게 없게 없게 있게 하는 무궁한 변화를 나투게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주의 실상이요 우리 각자의 모습이다. 이러한 진리는 알고 모름을 떠나 이미 그러한 것이다. 다만 성자들께서 그러한 진리를 먼저 깨치시어 우리를 진실의 세계로 인도하실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원상의 진리를 대하면서, 과연 나는 나라는 것에 대해서, 또 우리가 늘 몸담고 의지하며 그 힘으로 살아가는 이 우주에 대해서, 또 늘 서로 만나 희비애락의 감정 속에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이웃들에 대해서 얼마나 참모습을 알고 있으며 인생의 진실에 접근하고 있는가, 고요히 돌아볼 일이다. 그리하여 종래에 가졌던 어리석음의 눈을 씻고 다시 밝은 진리의 눈을 얻어서 옳고 그름과 허위와 진실과 이롭고 해로움을 참답게 알 수 있는 사람이 되고 거짓에 붙잡혀 울고 웃는 모든 이들을 바르게 인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일원상(一圓相)의 진리(眞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