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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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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교리

일원은 대소유무(小有無)에 분별이 없는 자리며, 생멸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며, 선악 업보가 끊어진 자리며, 언어명상(言語名相)이 돈공(頓空)한 자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자리’란 말씀이 계속 나오는데 다 같은 자리입니다. 같은 일원, 법신불 자리를 달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앉아 있는 자리도 알고 보면 내가 가서 엉덩이 붙이고 앉는 바로 그 자리가 내 자리입니다. 내가 지금 내 의자에 앉아서 그것을 내 자리라고 주장하면 그 의자를 엉덩이에 붙인 채 돌아다녀야 하겠지요. 하지만, 참으로 내 자리란 내가 필요할 때 가서 앉아 있는 자리를 말하겠지요.

법문에서 밝힌 ‘자리’란 쉽게 말하면 진리가 가서 앉은 자리입니다.

내 성품과 마음이 있는 그 자리는 다 이 ‘자리’입니다.

같은 ‘일원상’이 자리를 여기에 놓았다 저기에 놓았다 하는 차이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먼저, 일원은 대소 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라 하셨습니다.

대()란 우주만유의 본체를 말하고 소(小)란 만상 즉 만물이 형형색색으로 구별되어 있는 것을 말하며, 유무(有無)란 만물의 변화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대란 우주만유 전체를 말하고 소란 그 전체가 낱낱이 나누어져 있음을 말하고, 유무는 대와 소가 구분되어 있지만 그대로 멈춰 있지 않고 쉬임없이 변하고 있는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단순하게 중생들이 치열하게 분별하여 집착하는 기준인 크고() 작고(小) 있고(有) 없고(無)의 기준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일원 자리, 법신불 자리, 부처님과 성인들께서 깨치신 마음자리, 내 본래 성품 자리 그 자리는 한결같이 대소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 입니다.

정치인들이 치열한 정쟁에 휩싸이다가 잠시 물러서면서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제 마음을 비웠다. 바로 빌공자 공심이 됐다라는 말인데요.

그 마음을 비웠다는 참 의미는 바로 이 대소유무의 분별을 놓았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일원상 진리 자리는 크고 작고 있고 없고 하는 것에 분별이 없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뤄지면 마음의 자유를 얻습니다.

제가 10여년 전에 이리교당에 다니는 교도님한테 들은 이야기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그 시절의 서울, 부산과 같은 대도시에서야 너무 높은 건물이 많아서 과히 비교할 거리가 못되지만 원불교의 총부가 있는 익산에서는 이리교당을 신축했을 당시 주변에 그만한 높고 큰 건물이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이리교당에 다니는 교도들이 이 정도면 우리도 됐다 싶어서 긍지가 만만치 않았답니다. 그야말로 큰 대()자 큰 건물이었지요.

그런데 오래되지 않아 교당 바로 옆에 7층 건물이 올라가더니, 뒤이어 길건너 맞은편에는 삼성생명 12층 건물이 들어서자 이제는 전과 같이 확연하게 눈에 띄지도 않게 되고 말았습니다. 교당에 다니면서도 건물의 크기에 관심이 있었던 교도님들은 전보다 기가 죽는다고 하더라고 하더군요. 만약 그 건물이 다른 종교의 건물이었다면 그 심정은 어땠을까요.

그런데 말이지요. 그 교도님들 마음이 그렇게 바뀐 것이지. 이리교당 ‘5층 건물 부처님’ 마음에는 요동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5층 건물 그 자체였지 옆의 건물의 높이에 관계없이 커지거나 작아지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이 소식은 대종사님께서 변산에서 들려 주신 성리소식

변산구곡로에 돌이 서서 물소리 듣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렇게 일원, 법신불에는 대소(小)에 분별이 없습니다. 이 대소에 분별이 없는 사람은 대소에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제가 분당 신도시에서 교화할 때, 교도님들이 말씀하시기를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아파트 평수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머리 아프고 기죽는 일이 있다고 하시던데 만약 그렇다면 그 분은 바로 ‘대소의 노예’로 사는 것입니다. 스스로 만들어 낸 노예입니다.

분별하고 차별하기는 대소(小)나 고하(高下)나 유무나 마찬가지입니다.

일원은 유무(有無)에도 분별(分別)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대소는 얼마만큼 인가를 나타낸다면 유무는 가졌느냐 못 가졌느냐를 말합니다.

역사를 평가할 때 전쟁의 연속이라는 시각으로 봤다면 그것은 바로 이 ‘유무’의 싸움이자 전쟁일 것입니다. 누가 무엇을 얼마나 더 갖기 위한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갈림길도 여기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 역시 크게 사상으로 얘기해서 그렇지 엄밀히 말하면 개인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내것이냐, 네것이냐 하고 따지며 싸우는 것도 바로 내손 안에 있느냐 내손 밖에 있느냐의 차이 때문입니다.

유무는 달리 해석하면 변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유가 무로 되고 무에서 유가 나온다는 이치를 아는 사람은 다급하지가 않고 여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철이 변환하는 것인 줄 알고 기다리는 사람을 철이 들었다고 합니다.

마음을 멈추고 빈 마음으로 보면 그 자리에 대소가 있습니까 유무가 따로 있습니까 대소 유무에 분별이 없는 마음이 바로 중도입니다.

<정산종사법어 원리편 24장> 법문을 봉독해 올리고 오늘은 이상 마칠까 합니다.

말씀하시기를 "선악(선악(善) 미추(美醜)와 자타(自他) 미오(迷悧)의 상(相)이 없는 자리에서 나툰 분별이라야 그 분별이 바르며, 그 분별로 진리를 증득하고 실천하여야 원만한 도인이 되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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